16년 동안 뚜렷한 흥행작 하나를 만들지 못한 개발자가 있었습니다. ‘세피로스’, ‘펀치몬스터’, ‘데빌리언’ 개발에 참여했지만, 시장의 주목을 받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마흔을 갓 넘긴 김창한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마지막 승부로 선택한 장르는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배틀로얄이었습니다. 모바일게임과 MMORPG가 시장을 지배하던 2015년, 대부분의 게임사가 외면하던 분야였습니다. 김창한은 이 장르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고작 48쪽짜리 기획서에 자신의 구상을 담았습니다.
핵심은 달랐습니다. 국내에서 먼저 성공한 뒤 해외로 진출하는 기존 공식 대신, 처음부터 글로벌 PC 이용자를 겨냥했습니다. 완성된 게임을 스팀에 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 중인 작품을 먼저 공개하고 이용자의 반응을 확인하는 스팀 얼리액세스 전략도 세웠습니다.
당시 블루홀을 이끌던 장병규 의장은 검증되지 않은 장르에 투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반복된 실패를 이유로 김창한을 배제하는 대신, 그가 쌓아온 경험에 다시 베팅한 것입니다. 김창한 역시 배틀로얄 장르의 원형을 만든 브렌던 그린을 영입하며 프로젝트에 힘을 실었습니다.
개발진 30여 명은 1년 남짓 게임 제작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2017년, 결과물은 ‘배틀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모두가 외면했던 장르는 스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동시접속자 수는 3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실패를 거듭한 무명 개발자의 48쪽 기획서는 그렇게 세계적인 게임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훗날 배틀그라운드는 크래프톤의 대표 지식재산권으로 성장했고, 올해 2분기에는 크래프톤이 넥슨을 분기 기준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모두 앞서는 기반이 됐습니다.
넥슨 천하를 흔든 배그, ‘무명 개발자 48쪽 마지막 게임…18년 넥슨 천하 무너졌다’의 다음 탄환은 어디로 향하나
출시 9년이 지난 배틀그라운드가 마침내 분기 기준으로 넥슨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모두 넘어섰습니다. 크래프톤은 올해 2분기 매출 1조2902억원, 영업이익 4109억원을 기록하며 넥슨의 매출 1조1390억원과 영업이익 2943억원을 앞질렀습니다. 한때 무명에 가까웠던 개발자가 48쪽짜리 기획서에 걸었던 마지막 승부가 게임업계의 판도를 흔든 셈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18년 넥슨 천하가 끝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기록은 연간이 아닌 분기 실적이며, 넥슨은 메이플스토리·던전앤파이터·FC온라인 등 여러 대형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게임 성과가 주춤해도 다른 흥행작이 실적을 받쳐주는 구조입니다.
반면 크래프톤은 여전히 배틀그라운드 의존도가 높습니다. 배그를 모바일과 콘솔로 확장하고 인도 시장과 e스포츠로 영역을 넓히며 장수 프랜차이즈로 성장시켰지만, 다음 성장 동력이 없다면 실적 변동성이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크래프톤의 진짜 과제는 배그의 성공을 이어가는 동시에 배그 밖에서도 새로운 흥행 공식을 만드는 일입니다.
크래프톤은 자체 개발과 해외 스튜디오 투자를 병행하며 15개 신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인조이’와 ‘서브노티카2’처럼 슈팅게임이 아닌 장르에서도 가능성을 확인한 점은 긍정적입니다. 다만 제2의 배틀그라운드는 단순히 비슷한 규모의 신작을 내놓는다고 탄생하지 않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장르에 도전하고, 글로벌 이용자를 처음부터 겨냥했던 김창한 대표의 과감한 베팅이 다시 필요합니다.
배그는 크래프톤을 정상에 올려놓은 결정적 한 발이었습니다. 이제 업계의 시선은 그 다음 탄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넥슨의 다중 IP 전략을 넘어설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크래프톤의 일시적 역전과 장기적 1위 등극을 가를 전망입니다.
Reference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08130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