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경영진이 될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어온 요한 루퍼트 리치몬트 회장. 그런데 최근 39세 아들 안톤을 이사회 비상임 공동 부회장에 앉히고, 이번 인사를 “장기 승계 계획의 중요한 단계”라고 설명했습니다. 까르띠에와 반클리프 아펠을 거느린 명품 제국에서 무엇이 달라진 걸까요?
배경에는 급성장한 그룹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과제가 있습니다. 리치몬트의 매출은 2018회계연도 109억7900만유로에서 2026회계연도 224억2000만유로로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그룹의 규모가 커진 만큼, 브랜드의 장기적인 방향과 지배구조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이어줄지도 중요해졌습니다.
다만 이번 인사가 안톤의 일상적인 경영 참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룹 CEO 니콜라 보스는 계속 전문경영인으로서 리치몬트의 운영을 맡습니다. 안톤은 이사회와 산하 브랜드의 상품·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담당하며, 가문의 장기적인 관점과 메종의 정체성을 살피는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결국 이번 변화는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장기 방향과 지배력은 가문에”라는 승계 구도를 선명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회사를 곧바로 물려주는 대신, 전문경영 체제를 유지하면서 가문이 그룹의 방향과 연속성을 지키도록 역할을 나눈 셈입니다. “아들에게 안 물려준다”고 했던 루퍼트 회장의 태도 변화는 후계 구도를 둘러싼 오랜 논의가 한 단계 구체화됐다는 신호입니다.
아들에게 안 물려준다 선 긋더니…76세 명품 회장 돌변, 주식 10%로 지킨 경영권
리치몬트에서 루퍼트 가문은 회사 지분 10.18%를 보유하지만 의결권은 50.60%를 행사합니다. 주식 보유 비율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진 셈입니다. 이 구조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핵심은 서로 다른 의결권을 가진 두 종류의 주식입니다. 일반 투자자가 거래할 수 있는 A주와 달리, 비상장 B주는 루퍼트 가문의 지주회사가 보유하고 강한 의결권이 붙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외부 투자자가 A주를 대량 매입하더라도 가문의 동의 없이 경영권을 확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지분과 의결권이 크게 벌어진 구조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일반 주주들이 회사 자본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면서도 경영진 교체나 지배구조 변화에 충분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고 비판합니다. 반면 루퍼트 회장은 명품 사업에는 단기 실적보다 긴 호흡의 투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해왔습니다. 장인을 키우고 생산시설을 늘리며 브랜드의 가치를 쌓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기 주주의 요구에 흔들리지 않을 안정적인 지배구조가 필요하다는 논리입니다.
그는 과거 행동주의 펀드와의 갈등 속에서 “3개월 뒤 떠날 사람들”보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와 주주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가문의 의결권을 사적 이익에 이용하지 않았으며, 가족 지주회사도 일반 주주와 같은 조건으로 배당을 받아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지배구조는 아들 안톤의 부회장 선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루퍼트 회장이 과거 “아들은 경영진이 될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이번에는 안톤을 이사회 비상임 공동 부회장으로 선임하고 산하 메종의 상품·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다루는 위원회까지 맡겼습니다. 회장은 이를 장기 승계 계획의 중요한 단계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안톤이 곧바로 일상 경영을 맡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룹 운영은 니콜라 보스 CEO가 계속 책임지고, 안톤은 이사회에서 브랜드와 상품의 큰 방향을 살피는 역할을 맡습니다.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장기 방향과 지배력은 가문에’라는 구도가 한층 분명해진 셈입니다.
이 방식은 리치몬트의 브랜드별 독립성과 장기 투자를 지키는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강한 가문의 의결권이 다음 세대에 이어질 경우, 일반 주주가 경영을 견제하기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남습니다. 결국 루퍼트 가문의 승계 구도가 미래를 지킬 해법이 되려면, 안정적인 지배력뿐 아니라 그 권한을 어떻게 책임 있게 행사하는지도 함께 증명해야 합니다.
Reference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10103478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