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넬 메시가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린 순간, 그의 어깨에는 카타르 전통 의상인 비슈트가 걸쳐졌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상징하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지만, 동시에 개최국 카타르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각인한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축구의 영광 위에 국가의 메시지가 겹쳐진 것입니다.
비슈트는 단순한 의상이 아니었습니다. 카타르는 막대한 자원과 행정력을 투입해 월드컵을 개최했고, 결승전의 마지막 순간에는 그 투자의 흔적을 사진 한 장에 담아냈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장면에 자국의 전통과 권위를 함께 배치함으로써, 대회 개최국이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남긴 셈입니다.
이 장면은 스포츠가 국가 이미지 전략으로 활용되는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인권 문제나 정치적 논란 대신 축구, 스타 선수, 우승의 감동이 사람들의 기억을 차지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미겔 딜레이니의 신간 은 이러한 현상을 ‘스포츠워싱’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합니다.
문제는 국가의 개입이 이미지 홍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랍에미리트의 맨체스터 시티 인수, 카타르의 파리 생제르맹 인수, 사우디아라비아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인수처럼 오일머니는 유럽 축구의 구단 운영과 선수 영입, 대회 유치 방식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돈은 경기장 밖의 영향력을 경기장 안의 경쟁력으로 전환합니다.
축구의 매력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뒷받침하는 막대한 자금으로 특정 구단이 압도적인 선수단과 시스템을 갖추면, 전통적인 경쟁 질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트로피를 둘러싼 승부가 자본력의 대결로 변할수록 팬들이 사랑해온 불확실성과 서사는 조금씩 희미해집니다.
메시의 어깨에 걸린 비슈트는 그래서 여러 의미를 동시에 품습니다. 한편으로는 월드컵의 역사적인 순간을 장식한 상징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스포츠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어떻게 자신의 홍보 무대로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축구가 누구의 것인지 묻는 질문은 이제 경기 결과를 넘어, 그 무대와 영광을 누가 설계했는지까지 향하고 있습니다.
돈이 경기장을 지배할 때, 팬들은 무엇을 잃는가 — 축구 질서를 쥐락펴락하는 돈 많은 국가들’…신간
축구의 매력은 경기 시작 전까지 승자를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약팀이 강팀을 꺾고, 한 번의 역습과 골키퍼의 선방이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순간에 팬들은 열광합니다. 하지만 한 팀이 다른 구단과 비교하기 어려운 자금으로 스타 선수와 감독을 쓸어 담는다면, 우리가 보는 경기는 여전히 공정한 경쟁일까요?
미겔 딜레이니의 신간 《스포츠워싱: 축구를 집어삼킨 자본과 국가들》은 이 질문을 현대 축구의 핵심 문제로 끌어올립니다. 맨체스터 시티, 파리 생제르맹(PSG), 뉴캐슬 유나이티드처럼 막대한 자본을 등에 업은 구단들은 단기간에 세계적인 선수단과 훈련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투자는 곧 성적으로 이어졌고, 기존의 리그 판도와 명문 구단 중심의 질서도 빠르게 흔들렸습니다.
물론 자본 투자가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낡은 경기장을 개선하고, 유소년 시스템을 키우며, 선수와 팬을 위한 환경을 바꾸는 투자는 축구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특정 국가나 소유주가 사실상 무제한에 가까운 자금력을 바탕으로 경쟁의 출발선 자체를 바꿀 때 발생합니다.
재정적 페어플레이(FFP) 규정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단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돈을 쓰면, 성적 경쟁은 전술과 선수 육성보다 자금 조달 능력에 좌우될 수 있습니다. 팬들이 응원하는 것은 단순히 가장 비싼 선수들이 모인 팀이 아니라,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더 나은 전략과 투지로 승부하는 팀이기 때문입니다.
팬들이 잃는 것은 단지 ‘우승 경쟁의 긴장감’만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쌓아온 지역성과 클럽의 정체성도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구단이 팬보다 투자자의 수익과 국가 이미지 개선을 우선하기 시작하면, 경기장은 공동체의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홍보 무대로 변합니다.
2021년 유러피언 슈퍼리그 추진 사례는 이를 선명하게 보여줬습니다. 유럽의 일부 빅클럽들은 안정적인 수익과 상시 출전권을 확보하려 했지만, 팬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배제된 폐쇄적인 리그 구상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결국 주요 구단들이 잇따라 이탈하며 계획은 사실상 좌초됐습니다.
돈은 축구를 성장시킬 수 있지만, 팬들의 신뢰까지 살 수는 없습니다. 경기 결과의 불확실성, 클럽의 역사, 지역 공동체와의 유대가 사라진다면 화려한 스타와 우승 트로피만으로는 축구의 본질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자본이 경기장을 지배할수록, 축구계가 먼저 돌아봐야 할 대상은 투자자가 아니라 그라운드의 주인인 팬들입니다.
Reference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09020634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