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가장 큰 발레 무대의 한가운데, 한때 언어 장벽과 낯선 환경에 흔들리던 한국인 무용수가 있었습니다. 10년 전 “넘어지지만 말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던 정재은은 이제 폴란드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가 됐습니다. 바르샤바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은 어떻게 정상에 닿았을까요?
정재은이 폴란드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것은 2016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군무를 맡는 코르 드 발레 단원으로 출발해 코리페와 솔리스트를 거쳤고, 마침내 발레단의 최상위 등급인 수석무용수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바르샤바의 무대는 입단 초기 그에게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넓은 공간 위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듯했고, 낯선 언어와 문화는 일상적인 소통마저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언어 장벽으로 반년 넘게 고생했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긴장과 부담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재은은 매번 스스로에게 “넘어지지만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수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무대에 적응했고, 어느 순간부터 거대한 공간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움직임을 마음껏 펼치는 장소가 됐습니다. 이제 그는 바르샤바의 무대를 “내 집처럼 편안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자리 잡은 폴란드 국립발레단은 클래식 발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루는 ‘지젤’을 공연하고, 다음 날에는 조지 발란신의 작품을, 또 다른 날에는 현대 안무가의 발레를 소화합니다. 클래식과 드라마, 모던 발레를 오가는 폭넓은 레퍼토리는 정재은을 한층 단단한 무용수로 성장시켰습니다.
특히 쇼팽의 음악과 함께하는 바르샤바의 문화적 분위기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누구나 비교적 부담 없이 발레를 즐길 수 있는 공연 환경 속에서 그는 무대와 관객의 거리를 가까이 느꼈습니다. 그렇게 쌓인 시간은 ‘쇼팽의 숨결이 흐르는 무대, 바르샤바는 이제 나의 고향’이라는 말로 이어졌습니다.
수석무용수라는 새로운 출발점에 선 지금도 그의 목표는 소박합니다. 고질적인 발등 통증을 이겨내고 다치지 않은 채 오래 무대에 서는 것, 그리고 더 많은 작품 속 인물을 만나 깊이 있는 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외롭고 낯설었던 무대의 한가운데서 시작한 한국인 무용수의 이야기는 이제 바르샤바의 현재진행형인 전설이 되고 있습니다.
쇼팽의 숨결이 흐르는 무대, 바르샤바는 이제 나의 고향에서 완성한 파트너십
무대 위에서 예상치 못한 실수나 변수가 생기는 순간, 정재은과 키타이 료타는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그 짧은 시선만으로도 두 사람은 다시 호흡을 맞추고, 흐트러진 장면을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실제 연인이자 무대 위 파트너인 두 사람에게 눈맞춤은 완벽한 합을 되찾는 가장 확실한 신호다.
정재은과 키타이 료타는 폴란드 국립발레단에서 나란히 수석무용수의 자리에 올랐다. 아시아계 주역 커플이라는 특별함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오랜 시간 함께 쌓아온 신뢰다. 서로의 움직임과 호흡을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은 클래식 발레부터 현대적인 작품까지 무대의 성격에 맞춰 유연하게 변주한다.
두 사람의 일상은 화려한 커튼콜과는 거리가 있다. 아침이면 전동스쿠터를 타고 출근하고, 오전 클래스부터 오후 리허설까지 긴 시간을 함께 견딘다. 발의 피로를 덜기 위한 작은 습관부터 고된 연습을 버티는 순간까지, 무대 밖의 시간이 무대 위의 완벽한 호흡을 만들어낸다. 쇼팽의 음악이 흐르고 공연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바르샤바는 이제 나의 고향이라는 정재은의 말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수석무용수라는 정상에 오른 뒤에도 정재은이 가장 먼저 말하는 목표는 의외로 소박하다. 고질적인 발등 통증을 안고 있는 만큼, 더 높은 역할이나 화려한 명성보다 다치지 않고 오래 무대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매일의 공연을 안전하게 완주하고, 한 작품 한 작품 관객과 만나는 일. 그에게 발레는 특별한 날에만 존재하는 예술이 아니라 밥을 먹고 씻는 것처럼 꾸준히 이어가는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재은의 성공은 한 번의 승급이나 박수갈채로 완성되지 않는다. 서로의 눈을 보며 다시 중심을 찾는 순간, 통증을 견디면서도 무대에 오르는 하루, 그리고 쇼팽의 숨결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변함없이 춤을 이어가는 시간이 모여 지금의 그를 만든다.
Reference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08071551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