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영하 60도, 사체로 벽 쌓고 버텼다…엘리트 교수의 미친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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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by 한국경제

영하 60도의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벌어진 기괴한 광경,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티베트 고원 한복판에 세워진 벽은 단순한 방어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얼어 죽은 낙타와 야크의 사체로 만들어진 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벽 뒤로는 얼음이 뒤덮인 텐트와 원정대원의 희생이 숨겨져 있는데, 그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1927년, 해발 4600미터 고원에서 그들은 극한의 환경과 맞서야 했습니다. 강풍과 영하 60도의 추위는 이미 많은 동물과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고, 원정대는 동물 사체를 이용해 텐트 주변 방풍벽을 세우는 기이한 방식으로 생존을 유지했습니다. 사체들이 쌓인 벽은 냉혹한 자연 앞에서도 끝없이 버티는 불가사의한 성벽이 되었고, 그 뒤에는 한 사람의 비범한 인물, 니콜라스 레리히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이 충격적이고도 신비로운 현장은 단순한 생존극을 넘어, 한 엘리트 교수의 미친 도전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영하 60도라는 죽음의 온도와 사체로 쌓아올린 벽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레리히가 이곳에서 벌인 미친 짓의 진실은 무엇인지 지금부터 파헤쳐봅시다. 이 이야기는 자연의 극한과 인간의 집착이 만든 기적 또는 광기의 경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할 것입니다.

화가이자 몽상가, 니콜라스 레리히의 신비로운 꿈과 현실

세상 어떤 탐험보다도 가혹했던 한 겨울, 해발 4600m 티베트고원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영하 60도라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사체로 벽을 쌓고 버티며 극한의 생존전을 벌인 한 원정대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한겨울의 비극 뒤에는 누구보다도 다채로운 꿈과 이상을 품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계적인 미술가이자 탐험가, 그리고 고고학자 니콜라스 레리히입니다.

그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그림 속에 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열망을 담아내며, 엄혹한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갔던 몽상가였습니다. 왜 그는 히말라야 정복 대신 이상적인 불교 제국을 세우려 했을까요? 영하 60도, 사체로 벽 쌓고 버티며 벌인 ‘미친 짓’처럼 보이는 이 집착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던 걸까요? 그의 좌절과 꿈, 그리고 냉혹한 현실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탐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레리히는 우연히도 세계적인 예술가이자 탐험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전에, 러시아 상류층 출신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법학과 미술을 동시에 공부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10대 시절 고고학 유적 발굴에 참여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감수성을 키웠지요. 1906년에는 32살의 나이로 러시아 최대 예술학교의 교장 자리를 차지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으나, 곧이어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가 미국에서 펼친 활동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예술과 무용, 음악을 결합한 ‘마스터 인스티튜트’를 설립했고, 세계적 문화 인사들과 손잡아 뉴욕 문화계의 선두에서 활동했죠. 하지만 그의 독특한 미술 세계에는 기이한 면모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불교의 구세주인 미륵불과 연결된 선택받은 존재라고 믿으며, ‘신비주의’와 ‘음모론’에 빠져 드는 모습도 그 예입니다. 당시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 사이에 퍼졌던 신비주의 열풍과 맞물려, 레리히의 이러한 태도는 좀 더 이해할 만한 맥락이기도 합니다.

이런 평범하지 않은 인생 경로를 걷던 레리히는 자신의 신비로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원정대’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희귀 식물 표본을 모으기 위한 명목 아래, 그는 사실상 ‘이상적인 불교 제국’을 세우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죠. 1920년대 초, 인도에서 출발해 히말라야를 넘으며 ‘샹발라’를 찾아 나선 그의 여행은 5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 길고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그는 영하 60도의 혹독한 기후와 산소 부족, 때로는 도적떼와의 목숨을 건 싸움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며 꿈을 놓지 않았어요.

레리히의 그림은 극한의 자연을 표현하는 데 있어 독보적이었습니다. 얼거나 갈라지지 않는 템페라 물감으로, 차가운 하늘의 파란색과 보라색을 생생하게 담아냈죠. 그의 작품들은 마치 우주적 색채, ‘우주적인 색’이라고 평가받으며, 이후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우주에서 보았던 광경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의 그림뿐 아니라, 그의 꿈 속에는 ‘숨 막히는 설산에서의 다섯 달’, 영하 40도라는 초자연적 환경이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상향을 향한 그의 집착은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티베트 라싸에 도달했을 때, 영국과 미국 정보부의 냉혹한 계산은 그의 신념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영국은 그를 ‘러시아 스파이’로 몰아내기 위해 포위했고, 결국 그는 추운 산중에서 사체로 벽을 쌓았던 그 ‘미친 짓’과 같은 극한 생존을 강요받았습니다. 영하 60도, 얼어 죽는 사투 속에서도 그는 그림을 멈추지 않았고, 그가 남긴 작품은 ‘숭고한 공포’를 담고 있습니다.

레리히의 좌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생존의 벽과 실패의 좌절 속에서도, 그는 ‘문화는 평화의 근본’이라는 신념으로 미국에 돌아와 ‘문화재 보호 조약’을 추진하고, 전쟁 중에도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꿈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에는, 세상 정치의 냉혹한 현실에 밀려 다시 히말라야로 향했고, 결국 인도로 떠나 생을 마감했지요.

이 거대한 꿈을 품었던 화가이자 몽상가, 레리히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미친 짓’이라 부를 만한 행동 속에 수많은 철학적 의미와 인간의 절실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실패담이 아니라, ‘몽상가들이 세상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도시의 소음 속에서 느끼는 ‘고요함’과 ‘절대적 평화’는, 오히려 이 신비로운 색채와 꿈을 그려낸 그의 그림 속에 그 씨앗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니콜라스 레리히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묻습니다. 왜 그는 영하 60도, 사체로 벽을 쌓고 버티는 미친 짓을 감행했을까요? 그의 좌절과 꿈이 교차하는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품는 가장 깊은 열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ference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512056745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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